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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후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온 시인, 김시종 

김시종 시인은 70년 전 제주 4.3 사건 이후 재일조선인으로서 살아갔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부터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한국의 민주화에 이르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며 그에 대한 시를 썼다. 

남·북한,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조국의 문제에 대해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식채널e에서는 재일조선인 김시종(1929~)시인의 이야기를 그려낸 <경계의 시> 편을 방송한다. 


"나는 일본어에 복수하는 심정으로, 일본어 시를 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되고자 일본어에만 매진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조선인이지만 한글을 쓸 줄 몰랐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일본에서 해방되었다. 

소년은 죽을힘을 다해 한글을 공부했다. 

그때 그에게 다가온 한 편의 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시인 이육사의 시. 

소년은 저항시인의 시를 통해 진정한 해방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러나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차별적 진압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4.3에 연루되었던 김시종은 1949년 살아남기 위해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한다. 

그의 나이 스무살, 앞으로 수십 년간 계속될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이었다. 

오사카의 어느 양초공장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로 시를 쓰기 시작한 김시종. 

자신의 의식을 지배한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과거의 피식민자는 시를 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본어 시가 유려한 모습을 취할까봐 끊임없이 경계했다. 

매 문장마다 기성의 일본어와 대결하며 일본의 서정과 맞서며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형상화했다. 

그것이 김시종에게는 일본사회와 일본어에 대한 복수였다. 


4.3 이후 70년, 그의 ‘재일’은 끝나지 않는다 

일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950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 

그로 인해 재일조선인 사회 또한 균열이 심화된다. 

그는 남·북한 어느 국적도 선택하지 않고 조선적의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1998년, 수십 년이 지나고서야 그는 제주에 있는 부모님의 묘소를 매해 찾고자 한국적을 취득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재일을 사는’ 조선인이다. 

경계인으로 살아온 재일조선인 김시종 시인의 삶을 다룬 지식채널ⓔ ‘경계의 시’ 편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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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리아리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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